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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7, 2020

[채민기 기자의 신사의 품격] 뷔를 '소년'에서 '남자'로 만든 단 하나의 악센트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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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의 빌보드 정상 등극으로 함께 주목받은 방탄소년단 의상 중에서 과연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 스리피스(3 piece) 슈트였다. 스리피스 슈트는 이 곡의 디스코 리듬처럼 복고적이다. 그리고 이 옷엔 파스텔 같은 소년의 해사함과는 다른 남성미가 있다.

스리피스는 조끼까지 받쳐 입는 슈트다. 조끼는 라펠(깃)이나 더블버튼 같은 슈트의 장식을 차용하기도 하고 색이나 소재, 무늬를 액센트가 되기도 한다. 막후 실력자처럼 조끼는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슈트의 분위기를 결정짓는다. 조끼가 더해진 슈트는 한결 우아하고 진중하며 고전적이다.

(사진 왼쪽)‘여인의 향기’의 탱고 장면에서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플로어로 나가는 알 파치노. 성마른 노인이었던 그가 우아한 남자로 바뀌는 순간이다. (사진 오른쪽)지난달 미국 MTV 뮤직어워즈에서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방탄소년단 멤버 뷔. 순수한 소년과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시티라이트필름스·유튜브

2차 세계대전 당시 물자난에 조끼 생산 제한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스리피스는 기본에 속했다. 가장 인상 깊게 그 매력을 드러낸 건 영화 ‘여인의 향기’(1992)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 장교 프랭크(알 파치노)는 자신을 돌보게 된 고교생 찰리를 앞세워 뉴욕 여행을 떠난다. 조끼 없는 갈색 슈트를 걸치고 뉴욕에 온 프랭크가 본격 일정에 앞서 한 일은 재단사를 호텔로 불러 새 슈트를 짓는 것이었다. 프랭크가 선택한 회색 스리피스 슈트는 교복 같은 찰리의 남색 재킷과 대조를 이루며 원숙한 남자의 옷임을 보여준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프랭크는 줄곧 이 슈트 차림이다. 저 유명한 탱고 장면에서 정작 의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잠그지 않는다든가 스리피스엔 벨트보다 서스펜더(멜빵)가 권장 사항이라는 규범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프랭크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면 등에 걸친 멜빵 자국이 보인다). 빨간 페라리를 몰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에서도 같은 슈트를 입었다. 기품 있는 스리피스는 실명(失明)으로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기 전 프랭크에게도 빛나는 날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을 프랭크는 이내 어둠 속에서도 삶은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행이 끝나고 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찰리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프랭크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가 입은 또 다른 스리피스 슈트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을 상징한다. 이 자리에서 압도적 언변으로 청중을 휘어잡은 프랭크의 카리스마에 가장 합당한 의상이기도 하다.

갈수록 간소한 옷만이 인기인 요즘은 안타깝게도 스리피스 슈트를 찾아보기 어렵다. 언젠가 이 우아한 슈트가 복권(復權)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난망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이룩한 성과 역시 얼마 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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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08, 2020 at 04:39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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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기 기자의 신사의 품격] 뷔를 '소년'에서 '남자'로 만든 단 하나의 악센트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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